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탁통치 오보사건 (문단 편집) === 신탁통치에 우호적 관점 ===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신탁통치는 아직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한국을 안정시키고 조선인으로 구성된 된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에 그대로 물러나는 것이 조건이었지 일제와 같은 식민지 통치를 한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1945년 12월 기준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위치한 절대 다수의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은 열강 입장에서는 꽤 선심을 써 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어찌되었든 4개국 신탁통치의 목표는 조선반도에 항구한 민주주의 독립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따른 미소 공동위에서도 반탁 운동은 3상 합의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임시정부 구성 문제로 미소공동위가 결국 무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선언으로 인해 본격화된 [[냉전]] 체제와 미국의 외교 노선 변화가 2차 미소 공동위의 결렬 및 남북 단독 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었음을 생각해볼 때 1차 미소 공동위는 사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최적의 기회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오보 사건이 없었다면 궁극적으로는 [[6.25 전쟁|분단]]마저 안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겨레]] 21의 기사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6642.html|참고]] [[오스트리아]]도 [[연합군]]과 소련군이 함께 진주해 동서로 분단되었으나 좌우합작 하에 현명하게 분단을 극복한 사례가 있었다. 4당 코뮤니케가 국민 다수의 합리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면 이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보사건은 이런 적은 가능성마저 날려 버리는 결정타였다. 더불어 결과적으로도 신탁통치보다도 더 직접적인 미군정만 3년간 실시되었다. 광복이 1945년 8월 15일인데 남한 단독정부가 우여곡절 끝에 성립된 것이 1948년 8월 15일이었다. 신탁통치 반대는 그들이 그토록 주장했던 자주정부 수립조차 거의 도움에 안 되었다. 반탁을 지지한 김구나 이승만 등에게 악의적 의도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민족 지도자의 지위를 갖고 당시 정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라면 민족적 자존심 같은 막연한 동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무엇이 국가에 더 이득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이승만은 이후 [[정읍발언]] 등으로 미소공동위의 결렬 전부터 회담 결렬에 대한 전망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방향성을 내비친 바가 있다. 즉, 좌우합작이나 남북 통일정부보다 반공이 더욱 중요한 가치였던 이승만에게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적 지지 여론을 뒤집기 위한 좋은 기회였으며 실제로도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이후의 정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나가는 데 성공했다. 반면 김구는 반탁 운동, 1,2차 미소공동위 불참, 미소공위 결렬, 유엔 총회 이관 등 혼란한 정국이 지나고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이 다 물 건너간 뒤에야 통일정부 수립 노선으로 돌아섰지만 결국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